도입부는 강의실에서 본 스티브 잡스 일대기를 보고 떠오른 오래된 기억
관찰자의 시대 — 아버지의 애니콜부터 DS·Wii까지
중학교 때까지 나에게 '내 폰'은 없었다. 하굣길엔 늘 동전 몇 개로 공중전화 앞에 섰다. 번호는 외울 필요도 없었다. TV에서 반복해서 봤던 광고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됐고,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1633을 눌렀다. "네, 콜렉트콜입니다." 삐 소리가 나면 수화기에 대고 또렷하게 말했다. "어머니, 저예요." 초등학생이 공중전화 앞에서 어머니라고 부르던 시절 이야기다.
폰이 없었다고 해서 기기에 무관심했던 건 아니다. 내 기억 속 첫 모바일 기기는 아버지의 묵직한 녹색 액정 폰이었다. 이후 아버지가 '딸깍' 소리 나는 컬러 폴더폰으로 기변하셨을 때, 나는 그 화음 벨소리와 컬러 화면을 신기하게 만지작거렸다. 명절마다 사촌 동생의 폰을 빌려 쓰며 가로본능 폰, 안테나 뽑아 DMB 보던 폰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봤다. 나의 IT 체험은 그렇게 '간접 경험'으로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스마트폰 이전, 시대의 기술적 변화는 다른 기기들을 통해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당시 햅틱이나 프라다 같은 폰들은 지금의 정전식이 아니었다. 닌텐도 DS의 화면처럼 손톱이나 펜으로 '꾹' 눌러야 인식하는 감압식이었다. 손끝에 전해지던 그 묵직한 압력의 질감이 당시 우리가 느끼던 '터치'의 기본값이었다. 친척 거실에서는 허공에 리모컨을 휘두르는 닌텐도 Wii, 친구 집에서는 PlayStation 2의 체감형 게임 장비가 땀을 쏙 빼놓았다. 기기가 몸의 움직임을 읽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하드웨어가 인간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걸, 그때 이미 피부로 배우고 있었다.
탑건, 닐 암스트롱과 가가린, 그리고 하늘을 보던 시절
2007년 1월 9일.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발표했을 때 전 세계 IT 업계는 뒤집혔다. 그런데 그 순간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아이폰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게 된 건 1년쯤 뒤의 일이다.
당시 내 관심사는 IT가 아니라 하늘이었다. 그 씨앗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주말마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오던 테이프들이 떠오른다. 두형제는 인상깊었던 영화는 아마켓돈, 아폴로 13 있어지만 그 중에 최고의 영화였던건탑건(Top Gun, 1986)이 있었다. 톰 크루즈가 F-14를 몰고 하늘을 가르는 장면, 활주로 옆을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그 씬을 온 가족이 거실에서 함께 봤다. 파일럿이 멋있다는 감각은 그때 처음 생겼다.
2010년 무렵에는 러시아가 주관하는 가가린 첫 우주비행 50주년 기념 뉴스와 다큐가 심심찮게 나왔다. 1968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역사적 인물이었지만, 그를 통해 알게 된 사실 하나가 머릿속에 박혔다. 우주비행사들 상당수가 공군이나 전투기 파일럿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탑건으로 시작된 파일럿 동경이,닐 암스트롱과 가가린을 알개되며 더 높은 하늘로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같은 거실에서 탑건을 보던 동생이 그 시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나는 꽤 오랫동안 몰랐다.
IT 강국의 역설 — WIPI와 쇄국정책
하늘 위 이야기에 빠져 있는 사이, 땅 위에서도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폰이 세상을 바꾸던 2007년, 한국은 달랐다. 당시 한국은 WIPI(Wireless Internet Platform for Interoperability)라는 국산 무선 인터넷 플랫폼 탑재를 의무화하고 있었다. 모든 휴대폰에 이걸 넣어야만 국내 출시가 가능했다.
명목은 '표준화'와 '국산화'였지만 결과는 달랐다. 아이폰은 WIPI를 탑재하지 않아 한국에서 2009년까지 출시되지 못했다. 세계가 스마트폰 생태계로 빠르게 이동하는 동안, 한국의 이동통신 시장은 그 흐름에서 한 발짝 뒤처지게 되었다. 'IT 강국'이라는 자부심과 정반대 방향의 규제였다.
- 2007스티브 잡스, 1세대 아이폰 발표. 한국에선 WIPI 규제로 출시 불가.
- 2008한국 피쳐폰 시장 절정기. 가로본능, DMB폰 전성시대.
- 2009아이폰 3GS 드디어 한국 출시. WIPI 의무화 사실상 폐지 수순.
- 2010태양 활동 증가, 위성 GPS 교란 이슈 보도. 천리안 1호 발사.
- 2011피쳐폰 시장 급속 붕괴. 데니스 리치·스티브 잡스 별세. 한 시대가 저물다.
2011년은 이상하리만치 여러 이별이 겹쳤던 해다. 오늘 강의를 듣다 문득 떠올렸다. 2011년, 피쳐폰 시장이 급속히 무너졌고, 유닉스와 C언어를 만든 데니스 리치와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가 같은 해 세상을 떠난 날이였다. 시대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렇게 요란했다고 생각하니 나도 역사적인 순간에 써있어구나하며 그리고 바로 그 무렵, 드디어 나에게도 첫 폰이 생겼다.
구글 레퍼런스의 비극 — 넥서스원과 냉동실
피쳐폰의 시대가 저물고 스마트폰 열풍이 불어닥친 고1, 부모님이 대리점에 함께 갔다. 첫 폰이니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큰맘 먹고 할부로 사주셨다.
고민은 아이폰과 넥서스원 사이였다. 그런데 막상 가격표를 보니 아이폰3GS 이 넥서스원보다 오히려 저렴했다. 그럼에도 나는 넥서스원을 골랐다. '구글 레퍼런스폰'이라는 한 줄짜리 자존심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더 비싼 쪽을 선택한 아들을 말없이 할부로 긁어줬다. 동생은 LG 옵티머스 원을 골랐다.
처음 손에 쥐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다. 당시 기준으로 큰 액정, 손끝에 닿는 순간 반응하는 정전식 터치. 감압식 닌텐도 DS 화면을 긁던 손가락이 처음으로 신문물을 만진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알듯이 호주머니 넣으면 터치 오작동이나 지뭐대로 틈만나면 119나 112에 긴급전화로 걸릴때가 많았다.
유튜브를 켜면 스케이트보드 영상이 쏟아졌고, 앵그리버드·프루트 닌자·레이싱 썬더를 손가락으로 튕기고 긁고 기울이며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환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안드로이드 2.3(진저브레드) 업데이트 이후 넥서스원은 버벅임과 발열을 뿜기 시작했다. 동생의 옵티머스 원은 쾌적하게 잘만 돌아갔다. 더 비싼 걸 고른 보람이 없었다.
최적화 앱을 찾다가 탈옥 일명 루팅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였다. 공장초기화는 큰일 난다는 말을 신봉했고, 대신 SD카드를 빼두면 버튼 조합으로 복구할 수 있다는 걸 익혔다. 해외 롬 사이트에 새 버전이 올라올 때마다 설레며 접속했고, 하루에 두 번 이상 MIUI와 CM 시리즈를 갈아치웠다.
커스텀 롬은 단순한 최적화 도구가 아니었다. SD카드 일부를 SWAP으로 할당해 램처럼 쓰거나, 자이로스코프로 폰을 뒤집어 전화를 받거나, 터치 알고리즘을 바꿔 젖은 손에서도 인식되게 하는 등 지금 생각하면 참신하고, 당시엔 신기했던 기능들이 커스텀 롬 안에 있었다. 대신 배터리와 발열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태양 폭풍으로 GPS가 먹통이 될 때마다 내가 파티션을 잘못 건드린 줄 알고 폰을 수없이 초기화했다. 돌이켜보면 꼭 내 탓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전원버튼이 사망했다. 우회 부팅으로 버텼지만 결국 터치가 완전히 먹통이 됐을 때 수리점에 가져갔더니 돌아온 말은 단호했다. "수리비가 새 폰보다 비쌉니다." 반납하면 푼돈이라도 쳐준다고 했다. 폰을 넘겼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야 깨달았다. SD카드를 그냥 같이 줘버렸다는 걸.
냉동실 요법은 넥서스원에서 끝나지 않았다. 폰을 냉동실에 넣으면 성능이 살아난다는 잘못된 정보를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한동안 믿었다. 이후에 쓴 LG 시리즈들도 같은 이유로 줄줄이 메인보드가 사망했다. 결로가 원인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 냉동실 요법을 완전히 끊었다.
넥서스원은 1년을 조금 넘기고 손을 떠났다. 다음은 갤럭시 S2HD LTE였다. 신세계였다. 커널을 바꾸거나 롬을 올릴 이유가 없었다. 그냥 쓰면 됐다. 쾌적했고, 빨랐고, 아무것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는 꾸준히 탈옥 일명 루팅은 A/S영역에 합법이나 불법이다를 가지고 다투고 있을때였다. 갤럭시는 넥서스원에 비해 루팅에 진입장벽이 있긴했다. 그리고 A/S포기하기에는 리스크도 있어 점차 노하우 및 습득한 기술을 잊어버리기 시작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아쉽기도 하다. 넥서스원의 불편함이 조금만 더 이어졌다면, 롬을 받아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코드를 뜯어보거나 직접 만들어보지 않았을까. 불편함이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밀어넣어 줬을지도 모른다. 쾌적함은 때로 성장을 멈추게 한다.
군복무, 그리고 진공관 앞에서 배운 것
결국 둘 다 공군으로 갔다. 먼저 같이 가자고 한 건 동생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육군으로 입대를 할려고했는데 동생은 나를 설득하여 같이 동반입대를 하였다. 같은 병과로 들어갔지만 동생은 능력을 인정받아 장교 전속 행정병이 됐다. 조종사 출신 통신대장 곁에서 장교들과 매일 함께 일했다. 나는 유선체계병(통신)였지만 동생 덕분에 군 생활이 한결 수월했다.
나중에 입대하고 나서야 동생한테 그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 가고, 같이 공군 오고 나서 어느 날 툭 꺼낸 말이었다. 한때 공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다고. 막연한 동경이었는데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고, 그냥 마음속에 품었다가 조용히 내려놓은 꿈이었다고. 탑건을 같이 보던 그 시절부터였는지,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나중에 정규교육 과정 걸친 뒤 다른 부대로 전속을 가면서 전혀 다른 세계를 접하게 됐다. 항공무기정비계열 방공레이더정비특기였다. 전속 초기엔 막내 포지션이라 주로 안테나 분리, 무거운 공구와 교체할 진공관을 가져오는 게 내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두 종류의 군용 장비를 나란히 경험했다. 미국제호크(Hawk)와 국산무기인천궁이었다.
- 1960년대 설계, 진공관 기반
- 고장 나면 램프가 꺼지거나 경고등이 들어옴
- 회로판 빼서 교체, 안 되면 다른 장비 부속품으로 돌려막기
- 무겁고 느리지만 — 어디가 문제인지 눈에 보였다
- 반도체 전자회로, 모듈 단위 설계
- 무작정 뜯어낼 수 없음
- 컴퓨터 에러코드 → 회로도 분석 → 교범 참조
- 데이터는 많지만 — 에러코드가 불친절했다
호크는 직관적이었다. 위험하더라도 회로도와 직접 정비를 통해 개념을 익힐 수 있었다. 램프가 꺼지면 거기가 문제였다. 천궁은 달랐다. 정밀했지만 소프트웨어가 보여주는 에러코드는 추상적이었다. 그 표시를 해석하고, 회로도면과 교범을 같이 봐야 겨우 원인을 추적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소프트웨어 화면 위로 끌어올리려 했지만, 그 인터페이스는 아직 충분히 친절하지 않았다.
그때 느꼈다. 소프트웨어가 불친절할수록 사람이 더 많이 알아야 한다. 그리고 좋은 소프트웨어와 인터페이스는 공학을 이해한 사람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개발자가 회로도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진공관과 에러코드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묵직한 것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동생이랑 활주로 옆을 자전거로 달리게 된 날이 있었다.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바로 옆에서 출격했다. 탑건에서 톰 크루즈가 오토바이로 달리던 그 씬이 머릿속에서 겹쳤다. 오토바이 대신 자전거였지만 — 그걸로 충분했다. 탑건을 같이 보던 두 소년의 로망이, 그날 활주로 옆에서 조용히 해소됐다.
전역 후 회사 생활과 대학교 복학
군 전역후 바로 회사로 취업했다 한화시스템 협력업체로 방위사업계열로 전기 및 통신설비하는 회사였다.
취업하면서 부모님 도움으로 원룸을 잡고 전역일자 이후 평일에 바로 출근하였다. 회사에서는전술이동통신체계(TMCS, Tactical Mobile Communication System)시공 운용이 메인이였으며 주고객은 군용차량에 증폭기 및 전술단기능단말기(TMFT) 작업하며 잘몰랐던 TMCS개념을 이해한다.
회사내에서 다양한 사업중에 인상깊었던것은 공군 급유차량시뮬레이터 사업쪽인 인상깊었다. 의자와 일부 프레임만 봤을 때는 그냥 지나쳤을 텐데, 어떤 사업인지 파악하고 나니 달리 보였다. 당시에는 관련없는 분야였지만 나는 매혹적으로 느껴 그분야에 관심을 가진것같다. 다들은 관심없는 분야거나 모르면 그냥 의자를 만들거니할겠지만 급유차량시뮬레이터에 적합한 개발환경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시 아는만큼 보인다고 느껴졌다.
당시에는 궁금해서 물어보는것과 행사일정을 확인하고 어떤 사업인지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은 없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구동하는지와 접근방식에대해 이해를 갖고 이야기를 했다면 좋은 경험이 될을거라는 생각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복학 후에도 비교과과정으로 ADsP(데이터분석 준전문가) 및 IT 직무기초(코딩테스트 기초-PCCE)과정 이나 정규강의중에 인공지능과스마트시티1,2 수강하여 과정을 접했지만 아무런 기초가 없던 나는 Ai 및 딥러닝 기술과 모든 학습과정을 구경하는 겉햝기 수준이였다. 그래서 나는 전문적인 과정을 걷기위해 지금 인공지능 응용시스템 개발자 과정을 들어오게되었다. 비록 배움의 과정은 짧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제대로 된 개발자의 길로 첫발을 내딛고 싶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접점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아버지의 애니콜을 신기하게 만지작거리던 것, 닌텐도 DS 감압식 화면을 긁던 것, 넥서스원 시스템 파티션을 처음으로 들여다보던 것, 호크 레이더 진공관을 들고 뛰던 것, 천궁 에러코드 앞에서 회로도를 펼치던 것. 형태는 달랐지만 결국 같은 질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이게 만들 것인가.
넥서스원은 소프트웨어 안을 건드리는 법을 가르쳐줬다. 호크는 하드웨어가 왜 필요한지를 가르쳐줬다. 천궁은 인터페이스가 왜 중요한지를 가르쳐줬다. 그 셋이 연결된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돌아보면 기술의 흐름도 비슷한 궤적을 그렸다. 진공관과 트랜지스터로 대표되던 하드웨어 중심의 시대에서, PC·인터넷·스마트폰을 거치며 소프트웨어가 중심이 됐다. 그런데 지금은 AI 칩·NPU·엣지 컴퓨팅이 다시 하드웨어를 전면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소프트웨어만으로는 부족해진 시대가 다시 오고 있다.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그리고 다시 하드웨어로. 시대가 한 바퀴 돌아오고 있다. 1633을 누르던 소년이 개발자 과정에 앉아 있는 건, 어쩌면 그렇게 오래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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